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성경·예수님의 가르침·국제법으로 함께 보면
이 문제는 “이스라엘에게 땅을 약속하셨으니 전쟁도 정당한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면
자칫 성경 한 구절로 현대 전쟁을 정당화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경 전체와 현대 국제법을 함께 보면 오히려 훨씬 복잡하지만,
기독교인이 판단할 수 있는 상당히 분명한 원칙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현대 국가의 무제한적 권력에 대한 면허증이 아니며,
하나님의 정의는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권·안보권을 인정하는 것과
이스라엘 정부의 모든 군사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의 자결권과 민간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과
하마스의 민간인 공격이나 인질 억류를 정당화하는 것도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1. 출발점: 구약의 가나안 정복은 오늘날의 전쟁과 같은가?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가 이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셨으니
현대 이스라엘도 군사력으로 땅을 확보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경적으로 그렇게 바로 연결할 수 없습니다.
이유가 매우 중요합니다.
2. 가나안 정복은 ‘특정한 역사적 계시 명령’이었습니다
구약의 가나안 정복은 일반적인 전쟁 원칙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 특정한 백성, 특정한 땅, 특정한 하나님의 명령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니까 다른 민족의 땅을 차지하자.”고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심판과 약속의 역사 속에 놓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어떤 국가가
“성경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했으니
우리도 하나님 명령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성경의 구속사적 맥락을 제거한 것입니다.
3. 오히려 신명기는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경고를 합니다
신명기 9:4~6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의로워서 이 땅을 얻는 것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씀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땅 소유가
“우리가 다른 민족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라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도 계속해서
너희가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4. 그리고 이 원칙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적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한 심판을 허용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선택받았으므로 무조건 안전하다.”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선택받았기 때문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아모스 3:2의 논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5. 그러므로 현대 이스라엘에도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정부를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왕과 권력자를 얼마나 강하게 비판했는지를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나단은 다윗을 비판했고,
엘리야는 아합을 비판했고,
아모스와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사회의 불의를 끊임없이 고발했습니다.
왕이 이스라엘 왕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법 위에 있었던 적은 없습니다.
6. 오히려 성경은 ‘전쟁 중에도 정의’를 요구합니다
신명기 20장에는 전쟁에 관한 규정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 전쟁법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원칙은 분명합니다.
전쟁조차 하나님의 도덕법 아래 있습니다.
즉,
전쟁을 한다고 해서 모든 행동이 허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원칙은 현대의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과 상당히 연결될 수 있습니다.
7. 신약에서는 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어떻게 대하라고 말씀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4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은 개인 윤리에 관한 말씀이라고만 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기독교인이
적을 비인간화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정신을 보여줍니다.
8.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을 통해 민족적 경계를 뒤집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심각한 민족·종교적 갈등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을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방향으로 바꾸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바라볼 때 매우 중요한 윤리적 원칙입니다.
9. 민족적 피해자 의식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엄청난 역사적 박해를 경험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인 역시 나크바(Nakba)와 이후의 강제이주·분쟁·점령·전쟁 등으로
깊은 역사적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의 역사적 고통이
다른 쪽에 대한 무제한적 폭력의 면허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경험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팔레스타인인의 역사적 고통도 사소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의 경쟁을 만드는 순간 성경적 정의에서 멀어집니다.
10. 예수님은 민족적 승리보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 사회에는 로마에 대한 정치적·민족적 해방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칼을 통한 민족국가 건설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복음 18:36).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특정 현대 국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매우 중요한 원칙을 제공합니다.
11.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안보권은 인정해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기독교 윤리에서 이스라엘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스라엘 시민이 로켓 공격이나 테러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권리는 인정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똑같은 원칙이 팔레스타인 사람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간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동시에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국적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12. 이것이 ‘무차별적 보복’ 문제로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무장단체가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국가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국제법상 원칙적으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이 민간인을 공격했으니
우리도 적의 민간인을 공격해도 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도 문제가 있고,
현대 국제인도법상으로도 문제가 됩니다.
13. 현대 국제법에서 핵심은 ‘구별’입니다
국제인도법(IHL)의 핵심 원칙 중 하나가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별하라"는 것입니다.
군사적 목표물과 민간인·민간시설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격으로 인해 예상되는 민간인 피해가 군사적 이익에 비해
과도하지 않아야 한다는 비례성 원칙도 중요합니다.
따라서
“테러리스트가 숨어 있으니 그 지역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취급한다.”는 식의 논리는
국제인도법의 핵심 원칙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14. 이 부분은 성경의 ‘고대 전쟁’과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흔히 발생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구약의 특정 전쟁 본문을 현대 국제인도법의 규칙처럼 읽거나,
반대로 현대 국제인도법을 구약의 모든 전쟁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둘 다 적절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전쟁은 구속사적·고대 근동의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야 하고,
현대 전쟁은 현대 국제법의 틀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다만 성경에서 발견되는 인간 생명의 존엄, 약자 보호, 무고한 자에 대한 정의,
복수의 제한 등의 도덕적 원칙은 현대 기독교 윤리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15. 하마스에 대해서도 똑같은 기준이 적용됩니다
이 부분도 반드시 명확히 해야 합니다.
하마스의 민간인 공격, 민간인 살해, 인질 납치와 같은 행위는 기독교 윤리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지지한다고 해서 하마스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중요한 구분입니다.
팔레스타인인 ≠ 하마스입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과 하마스라는 무장·정치 조직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16. 반대로 이스라엘 정부와 이스라엘 국민도 구별해야 합니다
똑같이
이스라엘인 ≠ 이스라엘 정부입니다.
이스라엘 국민 전체가 정부의 모든 정책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며,
이스라엘 안에서도 정부의 전쟁 수행과 정착촌 정책 등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정부의 행동을 비판한다 = 반유대주의”라는 등식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유대인을 민족·종교적 이유로 혐오하는 것은 명백히 다른 문제입니다.
17. 이란 문제도 같은 원칙으로 봐야 합니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성경에서 페르시아와 이스라엘이 등장하므로
현대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도 성경의 예언이다.”라고 단순하게 연결하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의 고대 페르시아 제국과 현대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역사적으로 연속성이 있지만
동일한 정치적 실체는 아닙니다.
특히 다니엘서나 에스겔서의 특정 국가명을 현대 국가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상당한 해석상의 위험이 있습니다.
18. ‘곡과 마곡’을 현대 전쟁에 연결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에스겔 38~39장과 요한계시록 20장의 곡과 마곡을 현대의
러시아 ,이란 ,터키 , 중국,이스라엘등과 직접 연결하는 해석이 있지만,
본문 자체가 현대 국가의 이름과 군사동맹을 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번 전쟁이 곡과 마곡 전쟁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상당히 위험합니다.
19. 국제법에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는가?
현대 국제법에서는 크게 두 층위를 구별해야 합니다.
①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가?
이것은 jus ad bellum, 즉 전쟁 개시의 정당성 문제입니다.
대표적으로 유엔 헌장 체계에서는 국가 간 무력 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자위권 등을
예외로 인정합니다.
② 전쟁을 시작했다면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이것이 jus in bello, 즉 전쟁 수행법입니다.
여기서는
민간인 보호,구별,비례성,불필요한 고통의 금지,전쟁포로 및 부상자 보호,등이 중요합니다.
즉,
전쟁의 명분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전쟁 수행 과정에서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20. 기독교의 ‘정당한 전쟁론’과 연결하면
기독교 전통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발전한 정당한 전쟁론이 있습니다.
현대적으로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전쟁을 시작할 때
- 정당한 이유인가?
- 합법적 권위가 있는가?
- 진정한 목적이 평화인가?
- 다른 수단이 모두 실패했는가?
- 성공 가능성이 있는가?
- 예상되는 피해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전쟁 중에는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별하는가?
-필요 이상의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가?
-포로와 부상자를 보호하는가?
-보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가?등을 묻습니다.
21. 이것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적용하면
아주 중요한 결론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
국민을 테러와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권리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리가 무제한적인 군사작전이나 영토 확장을 자동으로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자결권과 인간으로서의 존엄, 안전, 자유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권리가 민간인 공격이나 인질 억류를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22. 그리고 여기서 성경의 ‘공의와 긍휼’이 중요해집니다
미가 6:8은 기독교 윤리를 아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스라엘 문제에서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1) 정의
이스라엘 민간인에 대한 테러를 비판해야 합니다.
동시에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생명과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도 비판해야 합니다.
2) 긍휼
전쟁으로 죽어가는 어린이와 가족들을 단순한 정치적 숫자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3) 겸손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라는 식으로 자기 정치적 입장을 신성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23. 구약의 선지자들은 바로 이 문제를 끊임없이 다뤘습니다
놀라운 것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게 가장 강력한 말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1장에서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사회적 정의를 무시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아모스 5장에서는 종교행사보다 정의가 물처럼 흐르는 것을 요구합니다.
예레미야는 성전 자체가 이스라엘의 죄를 면제해주는 보호막이 아니라고 경고합니다.
즉,
성전이 있다고 면죄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언약 백성이라고 면죄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원칙은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24. 그런데 이것은 팔레스타인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적 정의는 하마스와 같은 무장단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민간인을 살해하고,
인질을 잡고,
공포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저항운동이니까 괜찮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정의는 목적이 선하다고 수단까지 자동으로 선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25. 따라서 기독교인의 입장은 ‘누구 편인가?’보다 ‘어떤 원칙을 지키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저라면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정리하겠습니다.
| 문제 | 기독교적 판단 |
| 이스라엘 국민의 생존권 | 인정 |
| 팔레스타인인의 생존권 | 인정 |
| 유대인의 민족적·종교적 안전 | 존중 |
| 팔레스타인의 인간적 존엄과 자결권 | 존중 |
| 하마스의 민간인 공격 | 비판 |
| 민간인을 겨냥한 보복 | 비판 |
| 인질 납치 | 비판 |
|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 | 비판 |
| 점령·영토 문제 | 국제법과 정의의 기준으로 판단 |
| 이스라엘 정부 비판 | 가능 |
| 유대인 전체에 대한 혐오 | 거부 |
| 팔레스타인인 전체에 대한 혐오 | 거부 |
| 성경을 이용해 특정 정부의 모든 행동을 신성화 | 경계 |
26.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느 편인가?’
신학적으로는 이 질문을 조금 바꿔야 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니까 무조건 이스라엘 편”도 아니고,
“약자니까 무조건 팔레스타인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편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성경은 이스라엘에게 그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하박국에서 하나님은 유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바벨론을 사용하시면서도
바벨론의 교만과 폭력 역시 나중에 심판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민족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해서
그 민족의 모든 행위를 승인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현대 국제정치를 바라볼 때도 매우 중요한 신학적 원리입니다.
27.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명제의 진짜 의미
선택은
특권 + 책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궁극적 목적은 이스라엘만 잘 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열방을 향한 선교적·구속사적 사명을 포함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선택받았다는 것은
“우리는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다른 민족을 축복하시겠다.”는 방향입니다.
28.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이 약속은 더 넓어집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방에게 열리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신약의 방향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에서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민족의 하나님으로 확장됩니다.
결국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모든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종착점입니다.
29. 따라서 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보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기준
저는 다음의 7가지 원칙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봅니다.
① 이스라엘의 언약적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
② 그렇다고 현대 이스라엘 정부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신성화하지 않는다.
③ 유대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
④ 팔레스타인인의 생명과 자유와 존엄도 동일하게 보호한다.
⑤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테러를 거부한다.
⑥ 민간인을 집단적으로 처벌하는 것도 거부한다.
⑦ 궁극적으로 민족적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추구한다.
30. 마지막으로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표현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신약에서 가장 위험한 오해는
“선택받은 민족 = 하나님이 항상 옳다고 인정하는 민족”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는 정반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받았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하면 심판받았습니다.
가난한 자를 착취하면 심판받았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외면하면 심판받았습니다.
폭력을 행하면 심판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정의를 버리면 심판받았습니다.
그래서 선택은 면죄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더 무거운 책임입니다.
그리고 이 원칙은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 역시 선택받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베드로전서 4:17은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기독교인은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해서 팔레스타인을 미워할 수 없고,
팔레스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안전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어느 민족의 무조건적 편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인간이 언약을 배반하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서도
다시 회복하시는 섭리”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선택받았으니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라기보다,
“선택받았기 때문에 더 큰 책임을 지며, 실패했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역시
단순히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성경이 계속 질문해 온
“힘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의 정의를 어떻게 배반하는가,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은 어떻게 정의와 화해를 이루시는가”라는 훨씬 큰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