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의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본문: 요한일서 5:11–13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나는 정말 구원받았는가?”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아니면 조금 망설여지십니까?
“글쎄요. 교회는 다니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제가 워낙 부족해서 정말 구원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은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예전에는 확신이 있었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평생 의심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 구원의 확신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먼저 우리가 잘못된 곳에서 구원의 확신을 찾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바라봅니다.
“오늘 기도가 잘되는 것을 보니 구원받은 것 같습니다.”
“예배 때 눈물이 났으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요즘 기도가 잘 안 됩니다.”
“말씀을 읽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혹시 나 구원받지 못한 것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감정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감정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쁘다가 내일 슬플 수 있습니다.
오늘 믿음이 충만하다가 내일 낙심할 수 있습니다.
오늘 기도가 잘되다가 내일 기도가 한마디도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도 매일 변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내 감정의 안정성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2. 우리의 행위도 구원의 최종적인 근거가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바라봅니다.
“나는 교회에 오래 다녔습니다.”
“봉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십일조도 드립니다.”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죄도 많이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 행위를 바라보고 절망합니다.
“나는 아직도 죄를 짓습니다.”
“나는 성질을 못 고칩니다.”
“나는 용서를 잘 못합니다.”
“나는 기도를 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행위가 구원의 근거라면 아무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잘했다고 내일도 잘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늘 죄를 이겼다고 내일도 죄를 이긴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중요하지만,
신앙생활의 성적표가 구원의 근거는 아닙니다.
3. 그렇다면 구원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이 대답합니다.
11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여러분, 잘 보십시오.
영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아들 안에.”
영생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감정 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행위 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12절은 더욱 분명하게 말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면
나를 계속 들여다보기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4. “내가 얼마나 잘 믿는가?”보다 “내가 누구를 믿는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믿음에도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 믿음이 강한가?”를 너무 많이 생각합니다.
물론 믿음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능력은 믿음 자체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얼음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음이 두껍다면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얼음이 얇으면 불안합니다.
내가 얼음을 얼마나 강하게 믿는다고 해서 얇은 얼음이 두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의 강도가 아니라 내가 딛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가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믿음이 강합니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입니다.
믿음이 약해도 예수님은 강하십니다.
내 확신이 흔들려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 감정이 변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5.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되는가?
여기에서 한 가지 균형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만 믿는다고 하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 열매가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도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한 뒤,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즉,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행위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행위는 구원의 뿌리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열매가 나무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나무이기 때문에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6.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완전히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성도들이 힘들어합니다.
“목사님, 저는 구원받았다고 믿는데 왜 계속 죄를 짓습니까?”
“왜 같은 죄를 반복합니까?”
“왜 마음속에 이런 악한 생각이 생깁니까?”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완전히 죄가 없는 사람이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죄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죄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죄를 숨겼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옵니다.
예전에는 죄를 합리화했습니다.
이제는 죄를 인정합니다.
예전에는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죄 가운데 머물 때 마음이 아픕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7.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돌아오는 방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넘어집니다.
실패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멀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디를 향해 돌아가느냐입니다.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결심합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달려가 맞아주셨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넘어짐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킵니다.
그래서 구원의 증거 가운데 하나는
“나는 죄를 지어도 괜찮아.”가 아니라,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8.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그 사랑이 작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성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더 알고 싶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다.”
“예수님을 닮고 싶다.”라는 마음 자라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아이는 부모의 목소리에 반응합니다.
살아 있는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갈망이 생깁니다.
9. 사랑의 방향도 바뀝니다
요한일서는 계속해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중요한 표지로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도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사람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상처받으면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전과 똑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미워했던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하려고 노력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나만 생각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열매입니다.
10.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구원의 확신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 계속 바라보면 결국 절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살펴봐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했나?”
부족합니다.
“내가 순종했나?”
부족합니다.
“내가 죄를 이겼나?”
또 넘어졌습니다.
“내가 믿음이 좋은가?”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복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11.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자신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결국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넘어지기 전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베드로의 믿음이 강해서 끝까지 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손이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것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2. 구원의 확신은 ‘나는 절대 넘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은
“나는 앞으로 절대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확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넘어져도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것입니다.”라는 믿음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나는 완벽한 신앙인입니다.”라는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나의 구원자는 완전하십니다.”라는 그리스도 중심의 확신입니다.
13.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 마음을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행위를 계산하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을 말합니까?
“네가 충분히 잘했기 때문에 내가 죽었다.”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네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의로워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충성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완벽해서 구원받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14.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확실한 약속
요한일서 5장 1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성경은
“언젠가 영생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려고”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마 구원받았겠지…”라고 막연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15. 그렇다면 오늘 나는 무엇을 붙들어야 합니까?
세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첫째, 나의 감정을 붙들지 마십시오.
오늘 기분이 좋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마음이 무겁다고 구원을 잃은 것도 아닙니다.
감정은 변하지만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둘째, 나의 공로를 붙들지 마십시오.
“내가 이만큼 했습니다.”라는 것을 구원의 근거로 삼지 마십시오.
우리의 가장 선한 행위도 우리를 자랑하게 만드는 순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나는 부족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나는 자주 넘어집니다.”
그래도 그리스도께 나오십시오.
“나는 믿음이 약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구원의 확신은 ‘내가 얼마나 강한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맺는말 :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처음에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두 방향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열매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죄를 미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넘어졌을 때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열매를 살펴본 후 마지막에 우리가 붙드는 것은
나의 열매가 아닙니다.
다시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열매는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 고백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구원받은 이유는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하신 일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혹시 오늘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고 있습니까?
자신을 너무 오래 바라보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혹시 큰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다시 나갈 수 있을까?”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버지께 돌아가십시오.
혹시 오랫동안 신앙생활했지만
“나는 정말 구원받았을까?”
불안해하고 있습니까?
내 공로를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그리고 요한일서 5장 13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내가 얼마나 완벽한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내 믿음이 완전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는 완전하십니다.
내 사랑이 부족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내 순종이 흔들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넘어졌다면 다시 일어나십시오.
오늘도 죄를 지었다면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오늘도 믿음이 약하다면
“주님, 나의 믿음을 붙들어 주십시오.”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내가 붙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잡고 계신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두려움보다 복음을 붙드십시오.
자기 의보다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오늘도 담대하게 고백하십시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내게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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