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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준목의 설교연습

탕자의 비유는 사실 누구를 위한 말씀인가?

by 초보 준목 슬완빠(papa is ok) 2026.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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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15:11–32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마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이 이야기를 여러 번 들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서 집을 나간 둘째 아들.

먼 나라에서 재산을 다 탕진한 둘째 아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지 못할 정도로 비참해진 둘째 아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갑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흔히 이렇게 이해합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

맞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이 비유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조금 더 깊이 질문해 보겠습니다.

“이 비유의 진짜 수신자는 과연 둘째 아들뿐이었을까?”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비유는 집을 나간 둘째 아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집 안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맏아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오늘 이 말씀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보다,

교회 안에 오래 있는 우리에게 더 날카롭게 들려야 할 말씀인지도 모릅니다.

1. 이 비유의 시작은 탕자가 아니라 바리새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를 먼저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과 2절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나아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보고 수군거립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여러분, 이것이 누가복음 15장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를 갑자기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왔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죄인인데 왜 저 사람들을 받아줍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사는데 왜 저 사람들과 함께합니까?”

“저런 사람들은 먼저 회개하고 자격을 갖추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두 아들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단순히 “나쁜 아들이 돌아왔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통해

“너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2. 둘째 아들은 집을 떠났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당시 문화에서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요구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죽고 나면 제가 받을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지금 주십시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아들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납니다.

왜 떠났습니까?

아버지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삶이 답답했습니다.

아버지의 간섭 없이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주시는 복은 갖고 싶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싫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죄의 본질 가운데 하나입니다.

죄는 단순히 나쁜 행동 몇 가지가 아닙니다.

죄의 깊은 곳에는

“하나님 없이도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원하지만,

하나님 자신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뜻에는 순종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먼 나라로 갑니다.

3. 그러나 먼 나라에서 모든 것을 잃습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자유로웠을 것입니다.

돈도 있습니다.

친구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리고 결국 돼지를 치는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유대인에게 돼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아들은 그 돼지를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여러분,

회개의 시작은 바로 여기에서 일어납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합니다.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도 배불리 먹습니다.

그래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4.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달려옵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들은 준비한 말을 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

“손에 가락지를 끼우라.”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습니다.

왜입니까?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보다

아들의 귀환을 더 크게 보았습니다.

아들의 실패보다

아들의 돌아옴을 더 크게 보았습니다.

5. 그런데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성경책을 덮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십니다.

갑자기 맏아들이 등장합니다.

맏아들이 밭에서 돌아옵니다.

집 가까이에 왔습니다.

그런데 음악 소리가 들립니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종에게 물어봅니다.

“무슨 일입니까?”

종이 대답합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건강하게 돌아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맏아들이 어떻게 합니까?

화를 냅니다.

그리고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나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잘 보십시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도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습니다.

맏아들이 화를 내고 밖에 있을 때도 아버지가 밖으로 나갑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게 나갑니다.

둘째에게도 나가고,

맏아들에게도 나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둘 다 잃어버린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집 밖에서 잃어버렸고,

다른 한 사람은 집 안에서 잃어버렸습니다.

6. 맏아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나는 명령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가리켜 말합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맏아들은 분노합니다.

그런데 왜 분노합니까?

단순히 동생이 미워서만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나는 열심히 했습니다.”

“나는 충성했습니다.”

“나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나에게 보상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자기의의 모습입니다.

7. 둘째 아들과 맏아들은 정반대인 것 같지만 같습니다

둘째 아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멀어져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집을 떠났습니다.

맏아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순종하면 아버지는 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 한다.”

그래서 집에 남았습니다.

둘은 정반대처럼 보입니다.

 

한 사람은 방탕합니다.

한 사람은 성실합니다.

한 사람은 불순종합니다.

한 사람은 순종합니다.

 

그런데 더 깊이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아버지 자체보다 아버지가 주는 것을 원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보상을 얻기 위해 아버지 곁에 머물렀습니다.

둘째는 아버지를 이용했습니다.

맏아들도 아버지를 거래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가 없어도 좋습니다.”라고 말했고,

맏아들은

“내가 이렇게 했으니 아버지는 나에게 이것을 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방법은 달랐지만,

둘 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거래의 관계로 만들었습니다.

8. 이것이 오늘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말씀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오래 있었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예배를 빠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봉사했습니다.”

“나는 십일조도 했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직분도 맡았습니다.”

“나는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키웠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해주셔야 합니다.”라는 계산으로 바뀔 때입니다.

기도했으니 응답해 주셔야 합니다.

봉사했으니 인정해 주셔야 합니다.

헌금했으니 복을 주셔야 합니다.

열심히 살았으니 내 자녀가 잘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헌신했으니 하나님께서 내 삶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관계가 아니라 거래가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님께 섭섭해집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했는데 왜 저에게는 이것을 주지 않으십니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상을 지급해야 하는 주인처럼 대할 수 있습니다.

9. 둘째에게는 죄의 회개가 필요했고, 맏아들에게는 자기 의의 회개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중요한 지점입니다.

둘째 아들은 분명히 죄를 지었습니다.

그에게는 회개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에게도 회개가 필요했습니다.

둘째는

“나는 아버지 없이 살 수 있다.”라는 교만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맏아들은

“나는 아버지보다 의롭다.”라는 교만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둘째는 자기의 방탕함 때문에 아버지에게 돌아와야 했고,

맏아들은 자기의 의로움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가장 위험한 죄는 반드시 밖으로 드러나는 죄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생각 속에 숨어 있는 죄가 더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10. 예수님은 맏아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아버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장면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을 책망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여러분,

아버지는 맏아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 나가라.”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도 은혜를 베풉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

이것이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나와 함께 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은

둘째에게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맏아들에게도 동일하게 열려 있습니다.

11. 그런데 맏아들은 아직 잔치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이 비유가 정말 놀라워집니다.

성경은 맏아들이 결국 잔치에 들어갔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를 이렇게 끝내셨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들에게 선택을 맡기신 것입니다.

특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말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죄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어떠하냐?

너희도 잔치에 들어오겠느냐?

아니면 밖에 서 있겠느냐?

이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도 옵니다.

12. 우리는 둘째 아들의 귀환을 정말 기뻐합니까?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지 않던 사람이 돌아옵니다.

교회가 그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줍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줍니다.

그런데 오래 신앙생활한 성도가 속으로 생각합니다.

“왜 저 사람에게 저렇게 관심을 많이 주지?”

“나는 이렇게 오래 있었는데…”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과거에 큰 잘못을 했던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의 과거를 계속 기억합니다.

“저 사람이 예전에 뭘 했는지 아는데…”

물론 교회가 분별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회복에는 시간과 책임과 검증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이 회복되는 것을

기뻐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 안에 맏아들의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13. 아버지의 집에는 ‘공로’가 아니라 ‘은혜’가 기준입니다

맏아들은 공로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여러 해 섬겼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

맏아들은 보상을 이야기합니다.

“왜 나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잔치를 이야기합니다.

“네 동생이 돌아왔다.”

이것이 은혜의 세계와 공로의 세계의 차이입니다.

 

공로의 세계에서는

“누가 더 많이 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은혜의 세계에서는

“누가 돌아왔는가?”가 중요합니다.

 

공로의 세계에서는

“저 사람이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습니다.

은혜의 세계에서는

“저 사람이 살아났는가?”를 기뻐합니다.

14. 그러므로 복음은 둘째에게도, 맏아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둘째 아들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을 수 있습니다.

죄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맏아들의 모습으로 교회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봉사도 합니다.

헌신도 합니다.

그런데 마음에는 분노가 있습니다.

비교가 있습니다.

공로 의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도 들어오너라.”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15. 복음의 중심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비유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둘째 아들의 회개도 아니고,

맏아들의 불평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심에 있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둘째가 돌아올 때 달려갑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이 화를 낼 때 밖으로 나갑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모두 찾아갑니다.

왜입니까?

아버지에게는 둘 다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자격을 갖추어서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은혜로 아들의 자리를 다시 발견합니다.

16. 그리고 이 사랑은 결국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한 분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비난했습니다.

“죄인과 함께 먹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왜입니까?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착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충분히 회개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도 은혜가 필요하고,

맏아들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방탕한 사람도 십자가가 필요하고,

종교적인 사람도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도 은혜가 필요하고,

죄를 적게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17. 오늘 우리는 어느 자리에 서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먼 나라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대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너라.”

아버지는 문을 닫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나는 집 안에 있지만

맏아들의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했는데…”

“나는 저 사람보다 낫습니다.”

“왜 저 사람에게 은혜를 줍니까?”

“나는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그리고 우리를 잔치로 부르십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탕자의 비유는 단순히

“나쁜 아들이 착한 아들이 되었다.”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두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한 아들은 집을 떠났습니다.

다른 아들은 집에 남았습니다.

한 사람은 방탕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성실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아버지의 마음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떠났고,

맏아들은 아버지의 보상을 얻기 위해 아버지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두 사람 모두에게 나아가셨습니다.

둘째에게는 달려가셨고,

맏아들에게는 밖으로 나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를 잔치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맏아들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오늘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을 나누기 전에,

우리 모두가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돌아올 때 함께 기뻐하고,

상처받은 사람이 돌아올 때 품어주고,

넘어진 사람이 다시 일어날 때 박수쳐 주고,

하나님의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나의 은혜처럼 기뻐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어느 아들이냐?”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너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느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는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오겠느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먼 나라에 있는 분은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집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마음에서 멀어진 분도 돌아오십시오.

우리 모두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아버지의 잔치에 함께 들어갑시다.

 

잃은 자가 돌아오는 것을 함께 기뻐합시다.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을 함께 기뻐합시다.

왜냐하면

우리도 한때 잃어버린 자였고,

우리도 오직 아버지의 은혜로 여기 서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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