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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준목의 설교연습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by 초보 준목 슬완빠(papa is ok) 2026.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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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가 아니라, 누가 이웃이 되는가

본문: 누가복음 10:25–37

1. 본문을 시작하게 만든 질문: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율법교사의 질문을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지를 되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정확하게 대답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겉으로 보면 신학적인 질문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문맥에서 보면 이 질문은 단순한 지식의 질문이라기보다

사랑의 의무를 어디까지 적용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의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책임을 어디까지로 제한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의 범위’를 정의해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십니다.

2. 예수님은 ‘이웃의 정의’를 바꾸신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납니다.

그는 가진 것을 빼앗기고, 맞고, 거의 죽은 상태로 버려집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레위인도 지나갑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불편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사회적으로 경계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인을 긍휼을 베푸는 사람의 모델로 세우십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사마리아인도 네 이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질문 자체를 바꾸십니다.

율법교사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질문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결정적인 전환입니다.

이웃은 먼저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의 범위가 아니라,

내가 사랑을 가지고 다가가야 할 관계적 책임입니다.

3. 제사장과 레위인은 왜 지나갔는가?

본문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왜 지나갔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의 동기를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습니다.

그들은 보았지만 지나갔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보았고, 멈추었습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적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했는지를 종교적 신분이 아니라 긍휼의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교회는 깊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가장 많이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가장 가까이 사랑하는 사람인가?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성경을 공부합니다.

신학을 배웁니다.

기도합니다.

봉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신다면 어떻겠습니까?

“너희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너희가 누구의 상처 앞에서 멈추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말입니다.

4. “불쌍히 여겨” : 본문의 중심에는 긍휼이 있다

사마리아인이 행동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은 그가 그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긍휼이 단순한 감정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까이 갑니다.

상처를 싸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붓습니다.

자기 짐승에 태웁니다.

여관으로 데리고 갑니다.

돌봅니다.

그리고 비용을 지불합니다.

즉,

긍휼은 감정에서 시작하지만 행동으로 완성됩니다.

 

교회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안타깝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힘드시겠네요.”

이 말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긍휼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고통 때문에 나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간이 들고,

돈이 들고,

수고가 들고,

때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의 사랑에는 비용이 있었습니다.

5. “자기 짐승에 태워” : 사랑은 나의 것을 내어주는 것이다

본문에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은 사마리아인이 부상당한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동수단의 제공이 아닙니다.

그 순간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상대방의 필요를 자기 삶 안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사람은 걷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이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적 사랑의 한 모습입니다.

사랑은 내가 가진 것을 상대방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대방의 짐을 내가 함께 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2에서 말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바로 이러한 짐을 함께 지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6. “여관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교회는 응급처치소인가?

여기에서 목회적으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나옵니다.

사마리아인은 상처를 싸매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여관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계속 돌봅니다.

이 장면은 교회의 사명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에는 길에서 쓰러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단순히 ‘한 번의 도움’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관계의 파괴,중독,외로움,상실,이민과 정착의 어려움,신앙적 회의,교회에서 받은 상처 등

사람의 상처는 지속적인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히 사람을 교회 안으로 데려오는 곳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이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공동체적으로 돌보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예배당 문 안으로 사람을 데려오는 데만 관심을 갖고,

그 사람이 어떤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지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마리아인의 행동 가운데 일부만 이해한 것입니다.

7. 이 본문을 ‘도덕적 교훈’으로만 읽으면 위험하다

여기에서 설교자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우리도 사마리아인처럼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라는 도덕적 교훈으로만 끝내면 복음의 깊이가 약해집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처음부터 영생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율법교사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을 가리키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금방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가?

누가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나와 적대적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습니까?

내 시간과 돈과 편안함을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의 짐을 질 수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결국 자신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단순히

“사마리아인처럼 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자기중심성과 자기의의 문제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8. 율법은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하지만, 복음은 그 사랑의 근원을 보여준다

여기서 복음서 전체의 큰 흐름을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랑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랑할 사람을 선택합니다.

도움이 되는 사람을 가까이합니다.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 마음이 갑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줍니다.

로마서 5:8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이웃 사랑은 자기 힘으로 만들어내는 도덕적 성취가 아닙니다.

먼저 받은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입니다.

9.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교회사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을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읽는 해석도 오랫동안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본문의 유일한 의미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설교의 묵상 차원에서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긍휼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다가옵니다.

상처를 싸맵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줍니다.

돌봄의 자리로 데려갑니다.

이 장면을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결하여 묵상할 수 있습니다.

죄와 상처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그리스도께서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아간 것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웃 사랑 역시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리스도의 긍휼을 받은 사람이다.”라는 고백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10.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제자도는 움직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매우 간결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여기에는 동사가 있습니다.

‘가라.’

‘하라.’

기독교 신앙은 지식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고,

말씀을 통해 깨닫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다면,

그 은혜는 삶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교회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그리고 동시에,

그 복음 때문에 누구에게 가까이 가고 있는가?

11. 오늘날 교회가 들어야 할 세 가지 질문

첫째, 우리는 누구를 지나치고 있는가?

교회 주변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오지 않는 사람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지만 외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관계가 없는 사람,

상처를 입었지만 말하지 못하는 사람,

교회에 왔지만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

교회는 이들을 보고 있는가?

둘째, 우리의 사랑에는 비용이 있는가?

말로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내 것을 나누는 것은 어렵습니다.

상대방의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따라서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사랑에는 실제적인 비용이 들어가고 있는가?”

셋째, 우리는 이웃을 찾는가, 이웃이 되는가?

이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교회가

“우리에게 좋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인간관계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설교의 결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네 이웃이 누구냐?”라고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네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 주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강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쩌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외로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불편해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그냥 지나쳐 온 바로 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멈추십시오.

다가가십시오.

상처를 싸매십시오.

짐을 함께 지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의 긍휼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상처 입은 자리에서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상처 입은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긍휼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결국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늘 네가 이웃이 되어 줄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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