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주말에 동생의 교회에서 동생 대신에 설교할 내용을 올려봅니다.
오늘의 말씀
본문 성경말씀
1. 갈라디아서 3:26, 4:6-7
2. 마태복음 7:9-11
3. 로마서 8: 14-17
우리 모두는 어딘가에서 떠나온 아들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중에,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내가 저지른 일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나를 다시 받아 주실까?"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 질문들은 결코 나약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성도도, 처음 교회에 나온 새신자도, 어쩌면 오늘
말씀을 전하는 저 자신도 인생의 어느 순간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직접 대답하셨습니다. 말이 아니라 이야기로 즉, 단 하나의 비유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방탕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가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으셨던 핵심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진정한 관계는 무엇인가?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정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진정한 관계란?
먼저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 양자인 아들과 아버지 목사의 이야기>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시목하고 있는 노 XX 목사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노 목사님은 아들과 딸 각 1명 씩 있었고, 한국에서 셋째 남자아이를 입양해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으로 자신이 입양되어 온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 금요일 오후에 초등학교 체육수업중 다리가 삐어 집으로 올면서 쩔뚝거리는 모습을 본 아버지가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괜찮냐고 묻습니다. 아들은 괜찮다고 하면서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립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괜찮은 줄 알았고, 일요일에 이미 예정되어 있는 부흥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온 식구가
비행기를 타고 가기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밤새 다리의 통증으로 잠을 한 숨도 못 자고 있었고, 아침에 내려 오지 않아 아버지가
아들의 침실에 가서 확인해 보니 다리가 퉁퉁 부어 있어서, 아들을 데리고 교포 의사에게 가서 상태를
진찰했는 데, 교포의사가 하는 말이, “ 이 정도이면 엄청 아팠을 텐데, 병원을 이제 데리고 오면 어떡하냐? ”고
오히려 아버지를 질책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오던 중에 차 안에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 왜 그렇게 많이 아프면 병원 응급실이라고 가자고 하지 아무 말도 안 했느냐? 고 물으니
아들의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요일에 아빠 부흥집회 준비 때문에 바쁜거 뻔히 아는 데 , 내가 조금 참고 말지 아빠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말에 노 목사는 아들을 붙잡고 통곡을 합니다.
왜냐고요? 먼저 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가 4-5세 되었을 때에는 부모님을 세상의 모든 것보다 절대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물어보곤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WHY? “ 시리즈는 아이들의 궁금증을 모든 분야에 걸쳐서
설명해주는 명작입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해 물어보면 아이들에게 오히려 쓸데 없는 것 묻는다고,
나중에 다 알게 된다고 이런 식으로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하는 아이를 겁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어린 아이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린아이는 그 후로는 부모에게 질문을 주저하게 되고 나중에는 아예 묻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부모와 자식의 대화가 단절되면서 겉도는 관계로 진행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에게 묻고, 의지하고, 대화하고, 때로는 뗑깡아닌 억지도 부리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건강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현실은 대부분 이렇지 못합니다.
어릴 때 어른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흔히 이렇게 칭찬해줍니다..
” 우리 아들은 속이 다 들었어. 듬직해.“
이 말이 좋은 말 일까요?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건 거의 욕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집안 형편을 걱정하고 부모가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싸우는 것을 들으며
스스로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답게 부모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을 못하게 됩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뽀빠이도 사먹고 싶은 데, 학교에 미술재료도 사서 준비해 가야하는 데..
집안형편이 안 좋은 거 알고, 분위기를 보고 아예 포기하고 요구도 안하고 학교를 갑니다.
어린아이는 티없이 자라야 합니다. 세상 역경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누구나 다 겪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미리 어린아이에게 좌절감을 심어주고 스스로 눈치를 보게 만드십니까?
이렇게 어릴 때부터 눈치를 보고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동심을 잃어버리면 , 자기 자신보다
부모나 집안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 노목사님의 아들이 그런 말을 하게 된 겁니다.
여기서, 양자로 입양된 아들이 심하게 다친 것을 숨기고 , 목사인 아빠의 부흥집회 준비에
지장을 줄까봐 말을 안한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노 목사님은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이렇게 이야기했답니다.
”너가 나를 진짜 아빠로 생각했으면 미리 말을 하고 아프다고 병원 빨리 가자고 졸라야 했다.
그런데 내가 평소에 얼마나 너에게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면,
너가 어린아이답지 않게 오히려 나를 먼저 걱정한 것은 다 내 잘못이다. 미안하다.
내가 앞으로는 너의 진짜 아빠로서 너에게 믿음을 줄수 있게 노력하마.“
이러면서 아들을 껴안고 울었답니다.
전 이 대목에서 노 목사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많이 울었습니다.
저 자신도 한 어린아이로서 자랐고, 어린아이를 키워보았기에 진짜로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에게도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능력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성경말씀 중 로마서 8:15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권세를 주셨는 데
미리 지레 혼자 판단하는 것은 아들로서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들로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아들로서 종이 아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종과의 차이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종과의 차이를 비교해보겠습니다
1. 전적인 수용과 회복의 아버지
누가복음 15:20-22 절 탕자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 없이 기다리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2. 양자가 되는 은혜를 준 아버지.
로마서 8:15에서 법적인 상속자로 우리를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들은 그냥 종일 뿐입니다
3. 신뢰와 공급하는 아버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마테복음 7:9-11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4. 징계와 연단의 아버지
아들의 올바른 성장을 바라는 마음으로 징계와 연단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히브리서 12:6에서
바울 사도가 ”주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매질하시느니라고
하신 것이라.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대우하실 것이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들로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자세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부족함을 핑계로 구하지 아니하고, 피하고, 지레
포기하는 자세는 지양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자세가 아닙니다.
부족하면 구하고, 힘들면 의지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힘들면 힘들다고 해야 하는 데 참고 견디면서 부모에게 호소하지 않으면
그것을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 것 같습니까?
하나님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고 물어보고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는 미리 길을 예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농담을 하곤합니다
하나님에게 복권 당첨되기를 그렇게 기도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을 꿈속에 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했는 데 복권당첨의 은사를 안주십니까? ‘라고
.그랬더니 하나님이 ’ 그럼 최소한 복권은 사야되는 것 아니냐”라고 대답했답니다.
물론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 주시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천사, 곧 하나님과 끝까지 씨름하며 축복주기를 원했건 야곱의 집요함을
배워야 합니다. 결국 야곱은 축복을 받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뜻은 “네가 하나님과 대적하여 이겼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새 이스라엘이 전 세계 사람들의 여론 눈치 안보고 팔레스타인이나 이란에 대해
무자비하게 전쟁을 지속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뭏튼 일단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장남감을 사달라고 뗑깡을 부리면 부모의 입장에서 어떻게 합니까?
형편이 되는 대로 사줄 것은 사주고, 아무래도 아닌 것 같으면 말로 타일르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감추지 말고, 미리 우리가 체크해서
이것은 하나님이 안들어 주시겠지 하며 미리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7-8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가시기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허락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우리는 솔직히 고백합니다.우리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늘도 혼자 아파하면서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형편이 이러니까,내가 이런 사람이니까,아버지가 바쁘실 테니까,하며 스스로 포기하고,
스스로 눈치를 보며,혼자 삭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임을.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셨고,우리가 의지하기를 기다리고 계셨으며,
우리가 달려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음을.
주님,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종처럼 살지 않게 하옵소서.
두려움의 영으로 움츠러들지 않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귀한 이름,"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권세를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힘들 때 힘들다 말하고,아플 때 아프다 말하고,부족할 때 부족하다 말하며,어린아이처럼
아버지의 품에 달려가는담대한 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노 목사님의 입양된 아들이 아버지를 걱정한 나머지 밤새도록 혼자 아픔을 참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하오나 아버지,그 아버지가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미안하다, 내 잘못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오늘 우리를 그 품으로 안아주시고 계심을 믿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끝까지 씨름하며 축복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아버지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구하오니 주시고,찾으오니 찾게 하시고,두드리오니 열어주신다는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이 예배당 문을 나서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이 말씀을 들은 모든 분들의 마음 속에,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진정한 아들과 딸임을 삶 속에서 날마다 경험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보내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이 예배를 받아주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심을 믿으며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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